얼마 전 생일을 맞으신 분께 작은 화분을 선물했다.
애지중지 화분에 물을 듬뿍 주셨는데,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꽃이 자기 색깔을 잃고 선명한 주황색에서 빛바랜 주황이 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허옇게 되면서 시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분 것이라 내가 어쩔수는 없고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만 하다가 화분의 흙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보았다.
'이쿠!' 물이 흥건하게 흙에 고여 있는 것이 요녀석이 그 많은 물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영양 과잉(?)으로 힘겨웠겠구나 싶어 그 분께 말씀드렸다. 물을 곯려 흙이 마른 후에 다시 물을 주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 몇 일 금식이 아닌 금수(?)를 시키니 왠걸~! 다시금 주황색 꽃잎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야~! 사람보다 식물이 훨씬 회복력이 강하구나 싶었다. 몇일 사이 과잉되었던 수분으로부터 벗어나자 다시금 싱싱한 생명력을 뽐내며 본래의 자기 색깔을 찾아 돌아오는 녀석이 참 대견하다 싶다.
우리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히려 식물보다 못한 복원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어떨 때는 내가 요것밖에 안되는 사람이구나 싶어 참 부끄럽기까지 하다.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 몇 날 며칠을 웅크리고 있질 않나, 별 것 아닌 일에 열을 내고 그렇게 열을 내며 더 분해하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자주 생활에 등장하는지!
그에 비하면 식물들은 참 인내심이 강하다. 물을 많이 준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물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조용히 뿌리가 썩어가거나 하루 아침에 말라 죽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름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 사진의 모습처럼 빛깔을 서서히 잃어 간다거나 꽃잎이 시들거나 줄기가 휘거나 하는 등의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나라의 아동, 청소년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반응으로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있을까?
식물들처럼 말하지 않고 조짐만 보이다가 스스로의 생명을 조용히 내려놓는 아이들도 있고, 나를 좀 알아달라고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힘겨움을 외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집의 두 아이도 그랬거나, 지금도 그렇게 열심히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래도, 아무리 말썽을 부리고 어른들을 힘겹게 하는 아이들이 우리집에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무엇이? 그 아이들이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함께 씨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상황의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적당한 관심을 보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이 익숙하다. 많거나, 아님 적거나....이게 더 익숙하다. 한국에선 '적당히'라는 말이 좀 변질된 측면도 있어, 그것이 아주 적절한 정도라기 보다는 요령을 잘 부리는 것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이 '적당한 관심'이다. 박 완서 님은 이불같은 부모가 되라고 조언하셨다. 추울 때는 끌어다 덮지만 더울 때는 휙 하니 걷어 채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이 '적당한 관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어른들의 적절한 관심으로 '행복한' 청소년들이 우리들의 짐에서 양육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를 잃을 수 밖에 없었던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참된 위로와 회복이 있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 아파하는 유가족들에게 당신의 위로와 함께하심이 선물로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다시금 '행복'이 찾아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