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과 공생을 위한 교육의 가능성 (2)
# 이 글은 격월간『민들레』98호에 실린 것으로, 글쓴이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옮겨 싣습니다.
자율과 신뢰에 기초한 교육
시시콜콜한 규칙들과 명령에 따라 처신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환경은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해가 된다. 스스로 판단해서 자기 입장을 정하고 길을 찾는 경험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허용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의 핵심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신호등 안 지키기를 일상에서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예일대 교수 제임스 스콧의 주장도 이와 맥이 통한다. “언젠가 정의의 이름으로 중요한 법을 어기라는 요청을 받게 될 때”를 대비해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를 하자는 그의 주장은 일견 위험해 보이지만 깊이 새겨볼 말이다. 하지만 교육의 관점에서 공동체 법규를 위반하는 훈련을 날마다 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일이다. 법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공유공간 도로를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학교 또한 일상에서 그렇게 자율을 훈련하는 곳이 되어야 마땅하다. 공유공간처럼 잔소리 없는 학교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학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많은 대안학교들은 이와 유사한 교육철학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있는데, 교육공간의 운영방식에서는 좀더 열린 상상력이 필요하다. 메트스쿨의 공간과 교육과정을 설계한 빅픽처러닝(Big Picture Learning)은 애플 전시판매장에서 새로운 교육공간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기들을 살펴볼 수 있게 배려하는 애플 매장은 지나가다 들린 사람, 얌체처럼 기기를 이용하러 들린 사람도 가리지 않고 고객으로 배려한다. 도움을 청하면 친절하게 도와줄 따름이다. 마치 도서관이 그렇듯이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단순히 상품을 하나 더 팔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평생학습을 위한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나름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도서관과 애플 전시판매장의 분위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둘 다 교육이 아닌 배움을 위한 공간이다. 도서관이 학교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존 테일러 개토의 통찰력 번득이는 말은 교육공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 도서관에는 나이에 따라 격리된 아이들이 아니라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도서관은 독자들을 나이나 독서능력이라는 수상쩍은 기준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숲과 바다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들이 나이나 시험점수로 격리 수용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도서관은 보통 사람들의 판단력이면 대부분의 배움에 적합하다는 것을 직관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 사서는 무엇을 읽어라, 어떤 순서로 읽어라 하지 않고, 또 사람들의 독서에 점수를 매기지도 않습니다. 사서들은 그들의 고객을 신뢰하는 듯 보입니다. 사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질문을 하도록 허용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도와주지, 도서관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때에 도와주지 않습니다.
…… 도서관과 학교의 가장 주목할 만한 차이점은 도서관에서는 나쁜 행동을 하거나 총을 휘두르는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쁜 아이들도 얼마든지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말입니다. 나쁜 아이들도 도서관을 존중하는 것 같습니다. 이 흥미로운 현상은 도서관이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보여주는 존경심에 대한 무의식에 따른 반응일지 모릅니다.(『교실의 고백』 101쪽)
서울시청 내 <서울도서관> (좌), 중국 상하이의 애플 스토어 (우)
잔소리하지 않기, 신뢰하기, 가르치려 들지 않고 배울 수 있게 배려하기. 개토는 도서관이 갖고 있는 이런 원리 속에 진짜 교육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바보로 취급하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누구보다 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근대학교는 아이들을 바보로 취급하면서 결국 바보로 (성공적으로) 길러내고 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교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럴 의도로 학교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개토는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잔소리하지 않기, 신뢰하기, 가르치려 들지 않고 배울 수 있게 배려하기. 개토는 도서관이 갖고 있는 이런 원리 속에 진짜 교육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바보로 취급하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누구보다 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근대학교는 아이들을 바보로 취급하면서 결국 바보로 (성공적으로) 길러내고 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교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럴 의도로 학교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개토는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웃을 믿어라. 그러면 이웃은 나를 믿을 것이다. 이웃을 거룩하다고 여겨라. 그러면 이웃은 거룩함을 보여줄 것이다.” 랠프 에머슨의 이 말은 정신세계의 작용 반작용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말일 것이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교사는 그 반작용으로 아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교사가 아이들을 존중하기를 바란다면 교장이나 부모들이 교사를 존중해야 한다. 교장이 교사와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존경받는 길도 여기 있을 것이다. 우리 교육의 많은 문제는 이 신뢰와 존중의 고리가 끊어져 있는 데서 비롯된다. 이 고리를 잇는 작업은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
협력과 공생을 위한 교육
문제의 뿌리는 근대 학교교육 시스템이 교사를 존중하는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근대학교의 교사는 국가의 하수인일 따름이다.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살려주려는 교사들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변화를 위한 기초다. 훌륭한 교장은 그런 역할을 한다.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교사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그런 교장을 만나기가 힘든 만큼 교사들끼리 서로를 도울 필요가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지만, 현실에서 더 쉽게 확인되는 사실은 ‘하늘은 서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다. 신의 손길은 이웃과 동료들을 통해 내게 다가온다. 교육의 변화를 위해, 더 가깝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서로를 도울 일이다. 나무들이 서로 몸을 기대어 태풍도 이겨내듯이 서로를 지지하고 붙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협력을 잘하는 집단의 생존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 자연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기득권 집단의 통제 전략이지 경쟁을 해야 하는 당사자들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자연계든 인간계든 경쟁보다 협력이 더 일반적인 양상이라는 사실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생존경쟁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지나친 경쟁은 공멸로 이어진다. 적절한 경쟁과 협력이 공생과 번영의 필요조건이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이에 편승하는 교육 시스템은 사회의 분열과 전 지구적 재앙을 낳을 따름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학습과 시험을 거부하고, 협력해서 문제를 푸는 학습 방식과 공정한 평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주어진 문제를 혼자서 푸는 방식, 주어진 시간 안에 문제를 더 빨리 푸는 사람에게 유리한 방식의 시험은 역량을 키우는 길도 아니고 공정한 평가 방식도 아니다. 평가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속도가 느린 학생들에게는 시간이 더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공정한 교육이다. 세상이 머리 회전 빠른 사람에게만 유리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 시도되고 있는 차세대 평가는 느린 학습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는 시험시간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선발을 위한 평가가 아니라 학습을 위한 평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 능력, 협업 능력 같은 역량을 기르기 위한 학습과 평가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진정으로 학생들이 실력을 키우기를 바란다면 오픈북 시험 방식을 채택하고, 시험 시간도 유연하게 배정하고, 모둠이 협력해서 문제를 푸는 훈련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 변화를 앞당기기 위해 일제고사를 거부했듯이 줄 세우기 시험을 적극적으로 보이콧할 수도 있다. 수능시험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일인시위를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개토가 제안한 바틀비 프로젝트같이 얼핏 보면 비현실적인 주장처럼 보이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4) 작은 반란들이 모이면 시스템에 균열이 일어난다.
제언
경쟁을 부추기는 학습과 평가의 폐해를 자각하고 자율과 협력에 기초한 학습과 평가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개혁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경쟁력도 생겨날 수 있다. 남을 딛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도우면서 공동선을 이루는 과정에서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문화, 서로를 신뢰하고 자율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그런 사회는 위기에도 강하기 마련이다. 타율과 경쟁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자율과 협력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는 그 사회구성원들의 자각과 결단에 달려 있다.
개인에게는 사회에 적응하는 힘도 필요하지만 사회를 변혁하는 힘도 필요하다. 교육은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길러주면서 동시에 삐딱하게 볼 줄 아는 힘도 길러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보는 눈과 삐딱하게 보는 눈이 서로 보완작용을 할 때 세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고,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꿀 힘도 생겨난다.
지금의 사회에 적응하기보다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아이들을 기르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할 때다. 학교와 사회에서 작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무단횡단을 연습(?)하고, 신호등 없는 거리를 만들어내고, 줄 세우기 시험을 거부하고, 경쟁보다 협력의 경험을 북돋우는 작은 실천들을 해나가는 일이 곧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대학입학자격시험(SAT)를 비롯한 평가시험을 보이콧하기 위한 개인들의 실천을 공유하고 지원하고자 개토가 개설한 <바틀비 프로젝트> 공식 사이트 www.bartlebyproject.com에는 세계 각지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자기 경험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