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과 공생을 위한 가능성 (1)
# 이 글은 격월간『민들레』98호에 실린 것으로, 글쓴이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옮겨 싣습니다.
질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
오늘날 도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중 하나인 교통신호등의 역사는 알고 보면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1) 질서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교통신호등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인구 5만의 소도시 드라흐텐 시내에는 교통신호등이 없다. 하루 2만2천 대의 차량과 수천 대의 자전거와 보행자들이 다니는 라바이플라인 사거리가 2003년 로터리로 바뀌면서 신호등과 표지판, 차선, 차도와 인도를 가르는 턱이 모두 사라졌다. 법 대신 알아서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다. 우려와 달리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교통 흐름도 더 빨라졌다. 사람들은 신호등 대신 서로를 배려하며 제스처와 눈빛으로 소통했다. “혼란은 이해할 수 없을 뿐이지 크게 보면 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어떤 면에서 혼란과 질서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네덜란드의 교통공학자 한스 몬더만의 말이다.
신호등 없는 거리는 도로를 운전자, 보행자, 자전거가 함께 이용하는 광장처럼 만들어 공공성을 높이고자 하는 ‘공유공간(Shared Space)’ 철학에서 나왔다. 한스 몬더만이 창안한, 도시 디자인과 교통 설계의 새로운 개념이다. 몬더만은 우연히 정전이 되어 신호등이 꺼졌는데 교통이 혼잡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흐름이 빨라지는 것을 보면서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통관리 전문가들의 고질적인 문제는 도로에 문제가 생기면 항상 무언가를 더 추가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추가가 아니라 오히려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바이플라인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없지만 자전거 탄 아이들도 안심하고 다닌다. 오른쪽은 2002년 모습.
일상 속에서 자율을 학습하기
공유공간 개념의 핵심은 분리 대신 통합, 규제 대신 자율이다. 사람과 차를 섞고 도로와 주변 환경을 연결함으로써 서로 소통하는 좀더 인간적인 공간, 신호만 믿고 방심하는 게 아니라 주위를 살피면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새로운 윤리를 추구한다. 이 일은 공간의 성격,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바꿔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한스 몬더만은 그동안 각종 표지판과 신호가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고, 규제 없이는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사고 위험성을 높였다고 말한다. 도로에 신호등과 표지판이 지나치게 많을 경우 운전자들은 그걸 보느라 오히려 도로에서 눈길을 떼게 되어 더 위험해질 수 있다. 또 법규가 많을수록 운전자들은 법규 내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법규가 정하지 않은 것은 모두 무시하고 신호등과 신호등 사이에서 속도를 높이거나 끼어들기, 꼬리 물기를 하면서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 법규의 빈틈을 요리조리 찾게 된다.
공유공간을 한스 몬더만과 함께 설계했던 영국의 도시설계사 벤 해밀튼 베일리는 ‘어린이 주의’ 표지판보다 실제로 길에 어린이가 있을 때 운전자들이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한다. 벤은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질서의 본보기로 아이스링크를 꼽는다. 언뜻 무질서하게 보이는 스케이트장에는 선수와 초보자가 뒤섞여 있고 방향도 제각각인데다 속도도 다 다르지만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벤은 말한다. “안내판, 차선, 표지판, 신호등, 분리대 따위의 모든 장치를 없애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가 길을 걷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공간을 함께 쓰면서 서로 충돌을 피하고 주변과 교류하려고 더듬이를 곤두세울 것이다. 사람은 공중에 매달린 신호등에 반응하는 로봇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쓰는 지성을 갖췄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과잉 규제가 시야 협착(tunnel vision) 현상을 유발한다고 지적한다. 터널 속에서 입구를 통해서 보이는 만큼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야가 좁은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과잉 규제는 자신의 편의와 이익만 좇는 몰염치한 사람이 되도록 부추긴다. 말하자면 민주시민의 자질과는 반대되는 인간을 길러내는 셈이다(이는 온갖 잡다한 규칙들로 가득 찬 학교가 민주주의 교육과 어떻게 동떨어져 있는지를 말해준다).
한스 몬더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면 바보처럼 행동한다!” 시민을 관리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행정 당국의 시각이 도로에 반영된 것이 오늘날의 도로일 것이다. 신뢰에 기반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공유공간은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다.
거리는 일상 속의 교육공간이다. 몇 분 빨리 가기 위해 서로 잔머리를 굴리도록 가르치는 도로가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도로가 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 차선도 신호등도 없는 도로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은 몸으로 체득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배려 받으면서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순간순간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훈련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환경이 있을까.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평상시에 공동체를 위한 바람직한 판단과 처신을 할 줄 아는 민주시민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적절한 처신을 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혼자 살겠다고 잔머리를 굴리기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어른으로 자라날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 길은 아이들로 하여금 일상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도록 돕는 길이 최선이 아닐까?
도시에서 공유공간을 넓히는 일은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다. 2003년 드라흐텐에서 신호등이 사라지고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다. 운전자들은 도로 전체가 횡단보도가 됐다며 불만이었고, 보행자는 차를 피해 다녀야 한다고 불평했다. 자전거족도 불만이었다. “자율이 맘에 안 들어요. 아주 위험하죠.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곧 그 장점을 깨닫게 되면서 자율적인 질서가 생겨났다.
네덜란드 북부에서 30여 년 전에 시작된 공유공간 도로는 이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2) 유럽이 가장 앞서 있고, 북미와 남미,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에서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유럽 5개국은 2004~2008년에 걸쳐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벨기에, 영국의 7개 지자체가 참여한 이 사업의 결과, 안전과 교통 흐름이 모두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은 런던 도심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공유공간을 만들고 있는데, 지역에 따라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몰려 있는, 사우스 켄싱턴 역에서
하이드파크까지 이르는 820m 직선도로가 2009년 광장처럼 변했다.
교육공간에서 자율성 살리기
거리의 공유공간 개념은 교육공간에도 적용해봄 직하다. ‘분리 대신 통합, 규제 대신 자율’은 무엇보다 민주시민을 기르고자 하는 교육공간에 필요한 개념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소통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교육목표라면 마땅히 고려해볼 만하다. 무학년제나 모둠별 협력학습을 시도하는 교실은 공유공간 도로와 닮은 점이 있다. 학년별, 반별로 나뉜 교실에서 정해진 진도(속도)와 시간에 맞춰 교육하는 근대학교는 신호등에 따라 움직이는 도로와 흡사하다. 등수를 매기고 협력학습이 아닌 경쟁학습을 시키는 것은 마치 트랙을 그어놓고서 달리기 경주를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 같은 입시경쟁의 경우 개인의 관점에서는 누군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지 모르지만, 전체 관점에서 보면 소모적인 경쟁을 하느라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을 따름이다.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경쟁이 아닌 협력의 문화를 고양시키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데 공유공간 개념을 원용할 수 있다. 학교에 공유공간 개념을 적용할 때 물리적 공간이 분절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시간의 측면도 마찬가지다. 분절된 과목과 종소리에 따라 획일적으로 시간을 운용하는 것은 몰입을 방해하고 자발적인 학습을 방해한다. 학생들을 학년별로 나누어 수업을 하는 것도 달리 생각해볼 문제다. 학년을 나누고 학습 능력에 차이가 난다고 한 학년 안에서 또 우열반으로 나누는 것은 사실상 반교육적인 발상이다(이는 마치 교통 흐름이 나쁘다고 도로에 신호등과 표지판을 추가하는 것과 비슷하다).
통합의 원리는 학교 안에서의 시공간 통합을 넘어 학교 안팎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교와 지역사회를 넘나들며 배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학생들의 배움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지역사회의 활기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교육이 교사의 전문 분야라는 고정관념은 깨어져야 한다. 산나물 할머니도, 동네 목공소 아저씨도 얼마든지 교사가 될 수 있다(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학교들도 있다). 학교 담장을 허물어 학교 안팎을 하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학교와 지역사회의 관계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3)
분리와 규제가 아닌 통합과 자율의 원칙은 사실 학생보다 교사들에게 더 필요하다. 과목별로 나뉘어 지침서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자율성이야말로 교육의 본질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절실하다. 위계질서에 묶여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교사가 자율적인 민주시민을 길러내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사운동은 자율성 회복운동이 되어야 마땅하다. 교권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교사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학교 시스템과 교육당국을 향해서 주장해야 한다. 체벌을 할 수 있게 된다고 교권이 살아날 리 만무하다. 교사들의 자율성이 살아나면 자연스럽게 교권이 서고 아이들은 저절로 교사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계속)
현병호 『민들레』발행인. mindle98@empas.com
1) 3색 신호등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8년 미국 뉴욕 5번가였다. 당시는 경찰관이 유리탑 속에 서서 교통 흐름을 보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버튼을 누르는 수동식이었다. 그때 녹색등은 ‘좌우로 가시오’, 황색등은 ‘직진하시오’, 적색등은 ‘정지하시오’의 뜻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신호등은 1928년 영국 햄프턴에 처음 등장했다.
1) 3색 신호등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8년 미국 뉴욕 5번가였다. 당시는 경찰관이 유리탑 속에 서서 교통 흐름을 보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버튼을 누르는 수동식이었다. 그때 녹색등은 ‘좌우로 가시오’, 황색등은 ‘직진하시오’, 적색등은 ‘정지하시오’의 뜻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신호등은 1928년 영국 햄프턴에 처음 등장했다.
2) 한국의 경우 공유공간처럼 혁신적인 시도는 아직 없지만 신호 체계를 바꾸는 실험은 시도되고 있다. 경찰청은 2011년 7월 교통량이 비교적 적은 도로 8천여 곳의 신호등을 심야에는 노란색 점멸 신호로 바꿨는데 효과가 좋아 2만여 곳으로 확대했다. 보은군은 2011년에 모든 교통 신호등을 24시간 점멸 신호로 바꿨다.
3)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글라인슈테덴의 한 학교는 담장을 허물어 운동장과 도로를 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운전자들이 신호와 제한속도만 지키면서 운전할 때보다 더 조심하기 때문에 사고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더 파격적인 사례는 하렌의 작은 마을 노르드라렌에서 볼 수 있다. 리쇼크초등학교 앞 도로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바뀌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사람들의 삶의 질도 더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