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황 프란치스코가 장문의 권고문을 발표했다. "손에 흙 묻히는 것을 주저해선 안된다"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교회가 현실에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배제의 경제, 돈의 맹목성, 금융체제의 지배, 폭력을 부르는 불평등"을 오늘날 세계가 맞닥뜨린 도과제임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또한 "늙은 노숙인이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건 뉴스가 안되지만, 주식시장이 단 2포인트라도 떨어지면 뉴스가 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통탄했다. 고대에 숭배했던 황금송아지가 오늘날 '돈'으로 둔갑한 것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저자 중의 하나인 마이클 고힌 교수가 지난 1월 한국을 방문해 가진 강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교회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만 남기고 다 빼앗긴 상태가 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몇 번이고 되새겨 들을 말이다. 그런 그가 다음세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고등과정을 마칠 때 꼭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이나 '예수'를 거론하지 않고 "경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더해 "부모가 기독교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실, 기독교교육보다 좋은 대학을 원하는 경우가 많고, 진짜 원하는 것은 기독교교육이라기보다 좋은 성적에 조금 기독교적인 것"이라는 지적은 새겨 들을 일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적 상황을 예로 든 것이 아니라 북미와 호주의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교를 신봉하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만연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에서 기독교학교운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와 동일하다. 이미 내면화된 경쟁과 뿌리깊은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 입시라는 벽 앞에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은 참 비겁한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기독교를 앞세우지 않은 몇몇 대안학교가 더 오래전부터, 더욱 치열하게 이런 세속적, 세상적, 자본적 가치와 씨름하고 있는데 교회는, 기독교학교는 너무도 쉽게 현실론을 방패삼아 영혼을 내어준다. 어쩌면 최근에 기독교(대안)학교 지원자가 감소한 이유는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이제 겉에 발라놓은 아이스크림이 벗겨지고 그 속에 숨겨둔 케이크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대안적 세상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들이 그 자녀를 보내는 몇몇 대안학교 지원자는 줄지 않은 이유은 무얼까, 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낮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듯 우리의 교육은 엘리트교육이 아니라 이 땅에 소외된 자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가난한 자과 억눌린 자들에 대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해 예수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묵상하고(Inward Journey)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내야 한다(Outward Journey). 이미 게토화된 한국교회, 그래서 점점 변혁의 힘도, 시대를 향한 예언의 외침도 없는 기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우리의 아이들을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하되 가장 낮은 자리에, 더욱 깊은 곳으로 겸손히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소비주체로서가 아니라 함께 땀 흘리고 일하며 노동한 가치를 아는 노동주체로, 배워서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바람나무숲'이 할 일이다.
[글과 사진, 바람]
지난 10월말 청량리 밥퍼에서 봉사하는 샘물중학교(경기도 성남시 운중동) 8학년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