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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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음완보 微吟緩步 
June 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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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왼쪽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1번 반찬통의 상추샐러드, 2번 반찬통의 호박부침개,
3번 반찬통의 계란찜, 그리고 비어있는 4번 밥통
 
맛난 음식 앞에서는 잘 절제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학교 밥이 워낙 맛있어서 항상 양量을 넘치게 먹는다, 나이가 들수록 집밥이 좋기도 하고, 음식점을 경영했던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호사이기도 하다, 때로는 연구실에 혼자 있다보면 밥 먹는 시간을 종종 놓칠 때가 있어 언제부턴가 도시락을 싸 다니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준비하는 장모님이나 안해도 그리 귀찮아하진 않았다. 그냥 밥통에 있는 밥을 퍼 담고 늘 먹는 반찬 2~3가지만 반찬통에 담으면 되니까, 도시락을 위한 반찬을 별도로 만들진 않기 때문이기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다. 단점도 있지만, 도시락의 장점은 참 많다. 정해진 양만 먹게 되고, 음식쓰레기가 생기지 않으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도시락을 싸지 않아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날에는 속이 그리 편하지 않다.
 
그렇게 도시락으로 점심, 말 그대로 마음에 점만 찍는 식사를 하던 어느 날, 여의 날처럼 바닥에 티슈를 깔고 반창통부터 하나씩 열었다. 건너편 집 할머니가 직접 농사한 상추를 주셔서 실컷 쌈을 싸 먹었는데도 아직 남았는지 발사믹소스를 얹어 만든 상추샐러드가 가장 먼저 뚜껑을 연 1번 반찬통에 들어 있었다. 2번 반찬통에는 분명히 아침엔 먹은 기억이 없는데 언제 부쳤는지 호박부침이 들어 있었다. 애호박을 계란과 밀가루를 혼합한 반죽에 묻혀 부쳐 먹는 맛이란, 특히 완전히 익히지 않은 살짝 익은 호박의 아삭한 그 맛을 나는 참 좋아한다. 그리고 3번 반찬통을 열었다. 음~ 계란찜! 오늘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먼저 2번 반찬통의 호박부침 하나를 입에 넣고선 마지막 4번 밥통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밥통에 있어야 할 밥이 보이질 않았다.
 
우선 최근 내가 안해에게 무언가 잘못한게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지난 며칠 간의 일상을 복기해봐도 별로 기억에 남을만큼 간 큰 남편 짓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 요즘들어 가끔씩 무언가 하나를 빼먹는, 안해의 지극히 사소한 실수로 봐야 하나. 그래서 예의 밥이 담기지 않는 도시락 세트를 사진으로 담아 안해에게 보냈더니, 처음에는 이게 무슨 사진인고 하다가 4번 밥통에 밥이 담겨있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나, 하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참 미안하다는 안해에게 짐짓 여유있는 목소리로, 대체로 반찬이 싱거운 편이라 밥이 없어도 괜찮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라며 위로를 했다. 하지만 이 날 사건 이후 거의 열흘 넘게 나는 내게 불리한 일이 있을 때마다 4번 밥통에 밥이 담기지 않은 사실을 상기시키는 무척이나 쪼잔한 뒤끝을 보였다.
 
사실 4번 밥통에 밥이 없어도 그 어느 때 보다도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그것은 아마도 밥 대신에 담긴 안해의 사랑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담을 때 마음도 함께 퍼 담은 그간의 도시락이 쌓여 있었기에 오늘 4번 밥통에 밥이 없어도 배고프지 않다. 물론 이후로 4번 밥통은 도시락을 꺼낼 때마다 우선 확인하는 1번 밥통으로 순서가 바뀌었지만.   
 
정극인이 지은 가사 중 <상춘곡>이란 작품의 후반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의 호자 안자  나직이 읆조리며 천천히 걸어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조한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 보니  맑은 모래 위로 흐르는 깨끗한 물에 잔을 싯어 부어들고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ㅣ로다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구나
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메이 귄 거인고  무릉도원이 가깝구나, 저 들이 무릉도원인가
......
 
공명功名도 날 끠우고 부귀富貴도 날 끠우니  공리와 명예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그 어떤 벗이 있겠는가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헛된 생각을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미음완보 微吟緩步,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천천히 거닌다'는 뜻이다. 달이 바뀌기도 전에 이미 온 여름, 그래서 더 따가운 유월 햇살을 잠시 피해 때론 밥 대신에 누군가의 사랑을 담은 도시락을 들고 여행하자. 가까운 공원의 숲도 좋고, 뒷동산도 좋다. 여행한 그곳에서 미음완보하며 도시락에 담아온 누군가의 그 사랑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자. 그리고 작은 소리로 그분의 사랑을 노래하며 천천히 거닐어 보자.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물만 있더라도, 그렇게 가난하더라도, 그리 사랑하는 사람과 벗해 살아간다면 족하지 않겠는가.
 
 
[바람의 글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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