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연은 천지와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다. 천지는 남 주자니 싫고 가지자니 더 싫은, 그런 친구였다. 친구,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니야." 하는 동정틱한 우아한 말로 우쭐함을 누리는 재미와, 이상한 애라는 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끝내 이상한 애로 몰아붙이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친구험담이야 그 나이 때는 흔한 일이라며 자신에게 이기적인 당위성까지 부여햇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반복된 그 흔한 일이 천지에게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감기와도 같았다...............화연은 자신의 행동을 데이터처럼 몸에 저장하고 있는 천지가 불편했다. 그런 천지가 죽었다. 쌓인 트림이 한꺼번에 나온 것처럼 시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보다 더 꿉꿉한 공기가 몸속에서 우글우글 불어나는 것만 같았다.
- 천지는 8등에서 10등 사이를 오가며 고른 성적을 유지했다. 사실 그 정도로는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강한 인상을 쥐는 어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건성건성 공부하는 것처럼 행동해서 맘잡고 공부하면 1,2등도 문제 없을 거라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가슴에 묻어? 못묻어. 콘크리트를 콸콸 쏟아붓고, 그 위에 철불을 부어 굳혀도 안 묻혀. 묻어도, 묻어도, 바락바락 기어 나오는게 자식이야. 미안해서 못 묻고, 불쌍해서 못 묻고, 원통해서 못 묻어."
-선생님은 수경을 노려보았다. 학창 시절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지나가는 아이 하나 세워 놓고 훈계를 가장한 위협을 했던 아이들. 다른 아이 볼펜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갔던 아이들. 그 아이들도 그랬다. 빌려 달라고...... 선생님은 그 아이들과 수경의 모습이 겹쳐보여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구타빨하고 욕빨이 언제까지 먹힐 것 같니? 딱 열아홉살 때까지야. 줄여 입든 땡겨입든, 교복빨로 학생자격 유지하고 있는 그대까지. 나중에 우연히 동창이라도 만나 봐. 때린 너하고 맞은 애들하고 누가 더 쪽팔릴 것 같아? 졸업앨범만 봐도 노는 애들은 확 티가 나. 그런 애들일수록 나중에 자기 사진 다 오려내지. 근데 어덕하니. 그러고 다닌 거 알고 있는 산 증인들이 앨범에 그득한데. "
- 아이는 선생님이 아직 초짜라 의욕만 왕성하다고 했다. 저런 선생님한테 잘못 걸리면 재수없다. 한대 맞고 끝날 일도 괜히 크게 벌인다. 하지만 딱 삼년만 지나면 사랑으로 감쌀 일도 벌로 감싸고, 매나 벌로 감쌀 일 무관심으로 감쌀 거라고 했다. 놀라운건 글 아래로 많은 동의 댓글이 달렸다는 것이다. 사명감 불타는 초짜 선생님의 딱지를 떼는 통과 의례가 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정신줄 놓고 패기'라고 했다. 자기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라며 줄줄이 써놓은 글을 보고 선생님은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로 선생님이 정신줄을 놓고 마는 일을 두고, 아이들은 초짜 선생님의 통과 의례, 즉 신고식이라고 했다. 신고식을 거치면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선생님이 되어, 앞으로 계속 때리는 선생님이 되든 무관심으로 초지일관하는 선생님이 되든 한다는 것이다. 하여튼, 아이들은 아직 전설의 신고식을 치르지 않은 담임 선생님을 사명감만 불타는 초짜 선생님이라고 정의했다.
- "친한 척하면서 뒤에서 욕하고 다니는 애 있잖아. 언니는 그런 친구 없어?"
"그런애하고 친구 안해"
"만약에 친구 할 애가 그런애밖에 없으면?"
"그럼 그냥 혼자 다녀."
할 말이 없어서 창밖 가로수만 내다보았습니다.
........................................ 모든게 참 쉬운 언니가 부러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게 왜이렇게 무겁냐"
-"천지야 속에 담고 살지마.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소리는 못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
-" 나는 신이란 신은 다 믿어. 나쁜 짓 하라는 신은 없거든. 신이 얼마나 좋냐? 크리스마스하고 석가 탄신일에 사람들 푹 쉬게 해주잖아. 또 쉬게 해주는 신 없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은 지들이 돈 벌어 사먹게 하사, 일년에 한번은 푹 쉬게 해주시나니,극락세계가 따로 없나이다."
- "신은 정말 있을까? 있으면 왜 나쁜 사람들을 그냥 둘까?"
"얘는 그래서 잡아가는 사람도 만들었잖아."
"괜히 애써 무겁게 살지 마. 산다는 거 자체가 이미 무거운 거야. 똥폼잡고 인생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들, 아직 인생맛 제대로 못봐서 그래. 제대로 봐봐. 웃음밖에 안나와"
-아이들은 화연이가 뒤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활을 쏜 사람한테 뒤끝이 있을리가요. 활을 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사람, 아직 못봤습니다. 아이들은 과녁이 되어 몸 깊숙이 박힌 활이 아프다고 한 제게 뒤끝을 운운합니다. 참고 인내해야 하는 건 늘 당한 사람의 몫인지요. 아이들은 저 스스로 활을 뽑고 새살을 돋아나게 해 파인 자국을 메우길 바랐습니다. 그렇게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돋아난 살은 왜 그렇게 눈에 띄는지, 더 아팠습니다.
- "그런 사람하고 왜 결혼했어?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결혼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더라. 누가 누굴 지켜. 그거 웃긴거야."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지 그랬어?"
"지쳤지 나도. 사람 안변하더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원래'라는 말이야. 걔가 원래 그런다. 원래 그러는거 모르고 결혼했냐? 환장할뻔했다. 뭘해도, 원래라는 말 앞에서 다 무너지는 거야."
-"언젠가는 죽기 싫어도 죽어. 일부러 앞당기지 마.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사람들, 더 아프게 하는 거야. 죽어서 해결될 일 아무거도 없어. 묻어둘 수는 있겠지. 근데 그거, 해결되는 거 아냐. 냄새가 진동하거든. 진짜 복수는 살아남는 거야. 생명 다할때까지 살아."
-"부모님들이 시상대에 여럿이 올라가는 것보다, 자녀 혼자 올라가는 모습을 더 원하는게 아닐까요?"
"하하하, 생각해보니 나도 그러네요. 우리딸들이 제일이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나도 다 너희들을 위해서란다, 라고 하면서 아주우아하게 폭력을 행사했죠. 너 꼭 쟤 이겨야 돼. 결국 그거였거든요."
- 새끼들한테 인생전부를 건 엄마는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올 엄마가 있다는 믿음과 존재감은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 천지 일 앞에서 엄마는 무너져 버렸다. 믿음도 존재감도 주지 못한 엄마였다.
- 피한다고 피해질 사람 없고, 막는다고 막아질 사람 없어. 뭐 대단한 박애주의자나 되는 것처럼 세상 사람 다 용서하고 사랑할 필요도 없고. 미우면 미운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사는 거야."
-"나는 팥쥐 엄니라도 콩쥐편이어야. 넘으 가심에 구녕내고 다니는 딸년을 우짜고 편들어야? 뭣이냐 천진가 뭐인가 죽었담서?"
- 행하는 자, 즉 화연은 아쉽게도 영향력이 없었다. 화연은 시청자가 예상한 장면에서 예상한 효과음을 내주는 방청객에 불과했다. 가끔은 공감할 수 없는 장면에서조차 과장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오히려 거슬리는 그런 방청객. 방청객은 무대위 배우를 주도할 만한 막강한 영향력이 없다.
-와르르르. 만지는 떨리는 미라 어깨에서 돌탑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미라가 마지막에 올린 것은 매우 작은 돌이었을 지도 모른다. 층층히 쌓인 돌들이 더이상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줄도 모르고, 작은 돌 하나 올렸을 뿐인데, 그만 와르르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억울하겠지. 그저 작은 돌하나 올렸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동안 쌓았던 커다란 돌들의 주인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침묵앞에서 당황했겠지. 우리가 놓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어. 네가 돌을 잘못 얹었어. 네 책임이야.
- 가지고 나온 밥그릇은 그냥저냥 했던 모양인데, 누가 자꾸 재를 뿌렸나 보드라구요. 아이고 쓰다."
팽팽했다. 뒤에 어떤 말을 붙여도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화연 엄마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상대는 새끼를 잃은 어미다. 뿜어낼 수 있는 모든 독기를 모아, 목을 물어 뜯어버릴 각오가 된 사람이다. 순순히 목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도 아직, 새끼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