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jhun Music와의 인터뷰에서, 먼저 베토벤의 음악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작곡가가 몇 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첫번째로 생각나는 작곡가는 항상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매우 본질적인 요소를 변화시켰습니다. 음악의 기능 자체를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가 작곡을 했던 당시에는 시기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고 그 전에는 사람들이 귀족을 섬기는 시대였지요.
그리고 갑자기 귀족 계급이 없어지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어요.
베토벤은 이런 큰 변화에 사운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 줄게요.
이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출 수 있고 자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음악이 필요했어요.
예를 들어 이것을 들어보세요. 모짜르트의 '디베르티멘토'입니다.
우아하죠. 그들이 춤을 추면서 아름다운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이것은 귀족의 음악입니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러다가 그들이 갑자기 없어졌어요. 모두 죽거나 사라지게 되었죠.
귀족 계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음악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야생스런 스타일을 가진 베토벤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매우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여기에 있었다면 당신을 그가 두려워했을 거예요. (사회자가 그래요? 하며 웃는다)
와아아! 그는 와일드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충동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죠.
그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작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곡 방식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매우 강력한 힘과 엄청난 강렬함이 있어서 무서울 정도였죠.
귀족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말이죠. 그는 이런 식으로 교향곡을 시작했어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중 한 부분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곡의 제목을...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제목으로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교향곡이 된 것이죠.
하지만 나폴레옹이 스스로 왕관을 씌우고 시저와 같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베토벤은 너무 화가 나서 첫 페이지를 잡고 확 뜯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첫 페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어요.
그 다음에 페이지 맨 위에 "이 교향곡은 영웅을 위한 것이다."라고 썼어요.
하지만 나폴레옹을 위한 교향곡은 아니였어요. 영웅입니다."
그는 이반 피셔 Ivan Fischer(64)이다. 헝가리 출신의 거장 지휘자로 지난 달 세계 3대 오케스트라 중의 하나인
네덜란드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와 함께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를 위해 한국에 왔었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한 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베토벤 교향곡 전 9곡을 집중적으로 연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 내한공연이나 위의 인터뷰에서 보듯 피셔의 베토벤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그래서 더더욱 이 공연을 놓친게 못내 아쉬웠다.
마을에 TV가 몇 대 없던 시절, 시골 소년이었던 나는 우연한 계기로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생전 처음 턴테이블의 LP가 돌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음향에 매료되었고,
그때 들었던 게 공교롭게도 운명같이 베토벤의 '운명'을 듣게 되었다.
너무나 황홀해하는 내 모습을 지켜본 친구가 카세트테잎으로 녹음해 준 것을
집에 돌아와 스피커 하나(one way)만 달랑 달린 작은 카세트로 수 십 번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때 막혀있던 귀가 뻥 뚤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이후 고등학교 때는 몰래 음악다방을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카메라타'라는 클래식음악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시골에서 못다한 문화에 대한 허기를 채웠다.
암튼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제일 좋아하게 된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고 하니 마음이 동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시간을 좀처럼 낼 수가 없었고, 결국 이반 피셔가 연주한 음반과 연주 동영상, 혹은 관련 기사를 찾아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이반 피셔, 그가 해석한 베토벤은 남달랐다.
베토벤 음악이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지만 이를 새롭게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연주한 피셔의 연주도 놀라웠다.
음악전문가들로부터 '악보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연주한 것처럼 생생하다"하다는 극찬을 받은 그는
기존의 관습을 깨는 기발한 악기 배치로 신선한 음향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특히 한 신문사의 기사를 인용하면,
"교향곡 9번 '합창'의 3악장이 시작될 때 독창자는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 앞쪽에 나란히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네 명의 독창자는 각각 제 1, 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연주자들의 틈에 자리했고, 이에 의아함이 생겼지만
4악장 도입부에서 더블베이스가 제시한 저음의 선율이 베이스 가수에 의해 반복될 때 고개가 끄덕여질 수 있었다"
고 한다. 사실 파격적으로 보이는 피셔의 악기 배치는 주류와 다르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이런 시도는 베토벤이 작곡한 원전 그대로를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취한 방법이었는데 말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이 몰고온 광풍에 교육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교육의 본질을 고민하고, 그 원형에 따라 아이를 키우려고 하면 왠지 주류에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심지어는 그런 부모와 교사를 나태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교육의 본질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몫을 잘 찾아주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이들을 길들이려는 교육이 아닌 내면의 야성, 즉 본래의 형상, 그 원형을 잘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마치 원작자가 작곡한 의도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한 피셔의 시도가 주류에서 벗어난 파격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오히려 베토벤 음악을 가장 충실하게 전달해 주는 지휘자로 세계적인 거장이 된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와 교사 또한 아이가 창조된 본래의 형상과 목적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전달자로서
주류에 편승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따르는 파격을 서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부모와 교사가 변혁자적인 삶을 실천할 때 우리의 아이들도 주어진 영역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글,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