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나눔 있는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이 노래는 떼제 찬양으로 기독교인에게도 많이 알려져 불리고 있다.
정말 단순한 가락에 단순한 노랫말을 반복해서 부르고, 돌림 노래로 부르고...
한데, 이런 단순함 속에서 더 깊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이 찬양을 불러본 이들이면
느낄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많은 수의 클래식 음악인들이 젊을 때는 심각하고 열정적인 베토벤 음악의 팬이었다가, 나이가 들수록 단순 명료한
모짜르트의 음악이 좋아진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의 취향이 모두의 것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렇게 되는데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엔 정말 중요한 것이 많다고 느껴져서 작품을 만들든지 교육의 자리에 있든지 많은 것을 담아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정말 표현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길을 잃을 때도 있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좀 더 중요한 것을 더 표현하기 위해선 그보다 덜 중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여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헨리 나우웬과 함께하는 아침'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장소나 사람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완전히 자유로우십니다.
그분에게는 단순함과 자유, 그리고 순수함이 함께 있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막달라 마리아나 요한, 베드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단순하고, 순수하고, 자유로워서 부활하신 성자와의 만남은 완전히 내밀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는 마음은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는 슬픔과 기쁨 가운데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압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 순수하고 단순해질수록 더 분명히 보게 되리라는 것을.
단순한 찬양 속에서 더 깊이 주님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속의 많은 것들을 가지치기 하여
단순함 속에서 임마누엘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글, 나무/ 사진, 다음 자연박물관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