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을 막으려면, 경제는 어떻게 변혁되어야 하나? -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찰스 아이젠스타인, 정준형 옮김, 김영사, 2015) 서평
하승수(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이 글은 <녹색평론> 142호(2015.5-6)에 실린 것으로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일부를 옮겨 싣습니다.
웬만한 종합일간지보다 경제신문의 발행부수가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표자가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경제’이다. 그런데 정작 ‘경제’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경제’란 과연 무엇일까? 주식, 재테크, 부동산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경제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활동’이다. 많은 사람들은 ‘경제’라고 하면 돈을 매개로 사고 파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필요’는 반드시 돈을 주고 사야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도 되고 직접 만들어도 된다.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필요한 것을 조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에는 화폐를 통해 교환하는 경제도 있지만, 선물경제도 있고 자급경제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경제의 모습은 매우 다양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것만 경제활동으로 본다. 그런 식의 거래들을 집계해서 국내총생산(GDP)라는 것을 계산한다.
시스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GDP란 참 요상한 녀석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술 한잔 걸치고 야외에서 노래부르는 것은 GDP에 잡히지 않지만,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GDP에 잡힌다. 사람들이 나쁜 먹거리를 먹고 아파서 병원에 가면 GDP가 올라가는데, 건강하게 자기 텃밭에서 기른 음식을 집에서 먹는 것은 GDP와는 무관하다. 이웃끼리 돌아가며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은 GDP에 잡히지 않는데, 어린이집을 열고 보육비를 받으면 GDP가 증가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주류경제학은 워낙 완고하다. 물론 GDP에 대한 회의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우파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조차도 GDP는 더 이상 지표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문제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을 약간 손봐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곤과 불평등,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경제위기, 날로 심각해져가는 생태위기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이 유지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이 해야 할 역할은 기존 시스템의 위기를 해소하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책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러던 차에 통 큰 주장을 하는 책 한권을 접하게 되었다. 미국사람이고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천재적인 통합사상가라고 불리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김영사)」가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돈과 경제’를 만들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돈과 경제는 ‘신성한’ 돈과 경제라고 주장한다.
속물적인 것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돈이 어떻게 신성해질 수 있을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젠스타인은 돈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돈의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변혁은 돈이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성한 돈?
아이젠스타인은 이런 의문을 던진다. 세상 만물은 시간이 지나면 쇠락하고 흙으로 돌아가는데, 왜 돈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 덕분에 더 늘어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화폐가 발달하기 전에 화폐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던 것이 곡식이다. 그런데 곡식은 시간이 지나면 썩는다. 어떻게 보면 홍길동과 같은 의적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곡식이 탐관오리와 부자의 집에서 썩어 가는데, 바깥의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다. 이럴 때 창고의 곡식을 강제로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행위는 ‘의로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화폐는 어떤가? 화폐는 썩지 않는다. 게다가 ‘이자’를 통해 새끼를 쳐서 더 많은 돈을 낳는다. 그런데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쩔쩔맨다. 왜 돈은 자연의 이치와는 반대로 시간이 지나면 불어날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아이젠스타인은 우선 돈의 기원에 대해 살펴본다. 돈의 출발점을 살펴보니, 돈은 탐욕의 화신이 아니라 ‘선물의 매개체’였다.
아이젠스타인은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흔히 우리는 화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물물교환의 시대가 있었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아이젠스타인에 따르면, 그것은 인류학적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물물교환은 과거나 현재의 경제시스템에서 단 한번도 중요한 모델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렵ㆍ채취인들 사이에서는 물물교환이 아니라 선물이 일반적이었다. 선물은 서로 주고 받을 수도 있지만, 종종 원을 그리며 순환하기도 한다. 내가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은 또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러다보면 결국 나도 돌려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순환의 과정에서 돈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이젠스타인의 주장이다. 즉 돈은 선물을 촉진시키는 수단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이젠스타인의 얘기를 직접 한번 들어보자.
나는 당신이 필요한 것을 가졌고 그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당신에게 주면 당신은 고마워하며 내게 보답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당장은 내게 필요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아서 대신 감사의 징표를 준다. 조가비 목걸이나 은 조각처럼 쓸모없지만 예쁜 물건들 말이다. 그런 징표는 ‘나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감사하는 마음을 받았다’는 표시이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나도 그 징표를 줄 수 있다. 이렇게 선물은 광범위한 사회적 거리를 뛰어넘어 순환할 수 있고,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지금 당장 줄 것이 없어도 받을 수 있다(31쪽).
돈은 이렇게 출발했다는 것이다. 선물을 촉진하는 매개체로서 말이다. 물론 가족, 친족, 부락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는 굳이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해지는 때는 선물이 우리가 직접 아는 사람들의 범위를 넘어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실제로 최초의 돈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등 촌락을 뛰어넘어 발전한 농경문화에서 출현했다.
아이젠스타인은 이런 돈의 기원을 근거로, 신성한 경제를 재창조하려면 돈이 지녔던 본래의 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돈이 다시 선물의 매개체로 역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돈은 변질되었을까?
그렇다면 선물의 매개체이던 돈은 어떻게 신성함을 잃어버리고 변질되었을까? 아이젠스타인은 지금과 같은 돈은 기원전 7세기 그리스에서 출현했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에서 동전에 표시된 금액을 동전의 가치로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동전을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의 가치와 동전에 표시된 가치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돈이 금속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돈의 본질은 사회적 합의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돈은 닿는 것마다 동질화ㆍ표준화를 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물건들이 똑같이 1드라크마라는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정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돈은 금속과도 분리된다. 단지 종이에 불과한 지폐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편 돈은 교환의 수단을 넘어서서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교환수단으로서의 돈은 순환을 요구하지만, 가치저장수단으로서의 돈은 순환을 기피하게 된다. 축재(蓄財)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축재(蓄財)를 위한 돈벌이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돈벌이를 구분하고, 전자는 비정상적이고 한계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식의 돈벌이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토지를 비롯한 공유재가 사유화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상가들이 부당함을 지적해 왔다. 토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선물이다. 그런데 토지를 선점한 사람들이 사유화하면서 지대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토지를 비롯한 공유자원들도 이제는 돈으로 표시되기 시작한다.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존재들이 된 것이다. 아이젠스타인의 표현에 따르면, “닿는 것마다 동질화시키는 돈의 위력은 자연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돈으로 바꿔놓는다”.
(중략)
새로운 체제를 원한다
아이젠스타인은 근본적인 변화를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낯설 수도 있고, 현실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다. 물론 그가 주장한 것을 실제 현실에 도입할 때에는 검토해야 할 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변화는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큰 전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돈의 변혁은 지금 필요한 거대한 전환의 한 부분이다. 지금 부딪히고 있는 전 지구적인 경제위기, 생태위기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 위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아이젠스타인이 말하는 것처럼 ‘신성한 돈’을 회복함으로써 새로운 경제로 가는 출구를 열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는 정치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지금처럼 공유자원이 사유화되고, 맹목적인 경제성장주의가 지배하게 된 것은 결국 정치의 문제이다. 아이젠스타인은 “어떤 형태이든 정부의 주된 목적은 공유자원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의 정부는 반대의 역할을 해 왔다. 그래서 전환의 경제는 전환의 정치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제도의 영역만이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삶도 바뀌어야 한다. 책을 보면, 리처드 리라는 인류학자가 쿵 부족이라는 부족의 ‘소마’ 부족원과 대화한 내용이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생각이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소마에게 물었다. "카이하(부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집에 카이(구슬이나 귀한 물건)을 많이 쌓아둔 사람인가요?"
"카이를 많이 가졌다고 카이하가 아닙니다" 소마가 대답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뜨리는 사람을 카이하라고 부릅니다."(269쪽)
이런 생각을 회복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른다.